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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황금사자기/야구 문외한 여기자가 본 관중석 세상
입력 2010-03-26 03:00:00

“아들, 침착하게!” 선수 엄마들 수능 지켜보듯 조마조마
“후배, 한방 날려!” 직원 몰래 응원 온 사장 선배 고래고래


 


택시 창밖으로 목동야구장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 밝히기를 꺼린 택시기사(77)가 말했다. “바람 불어 애들 춥겠네. 야구는 수비하느라 서 있는 시간이 많아서… 쯧쯧.”

그에게 물었다. “고교야구 좋아하세요?”

“1980년대 초 군산상고 조계현 투수가 굉장했지요. 이젠 꽤 나이 들었겠구먼. 고교야구 보면서 ‘저 녀석 공 던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 ‘저 학생은 수비수로 꽤 쓸 만하네’ 점찍는 재미가 있었죠. 동대문야구장에 빈자리가 없던 시절이지요.”

과거를 회상하는 듯 룸미러에 비친 그의 주름진 눈이 반달 모양으로 웃고 있었다.

야구의 ‘야’자도 모르는 기자가 제64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속으로 뛰어 들어가 봤다.


○ 남자의 세계, 엄마의 세계


고교야구 관중석은 크게 남자들의 세계와 엄마들의 세계로 나뉘는 것 같다. 나이 지긋한 동문들은 모교의 ‘전투’ 앞에서 응집력을 자랑하고 선수 엄마들은 대학수학능력시험과 다름없는 한 게임 한 게임에 마음 졸인다.

17일 서울 충암고 대 마산 용마고 경기. 충암고 동문들은 후배들의 경기를 응원하다 의기투합해 사회인 야구단 ‘템페스트’를 결성하기도 했다. 응원단의 걸걸한 목소리가 운동장을 울렸다. 내야수 류지혁 선수(3학년) 어머니가 동문들에게 따끈한 차를 돌렸다. 아들이 타석에 섰지만 그는 “못 보겠다”며 고개를 돌렸다.

“충암고 유니폼이 1977년 이후 그대로예요. 그때 고2였죠. 저 유니폼을 ‘전통복’이라 불러요. 아, 옛날 생각나네요.”(동문 우정섭 씨·49) “고교야구는 몸 사리지 않고 열심히 치고 달리는 게 매력이죠. 1루에서 아웃될 거 알면서도 슬라이딩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요. 우리 후배들이라 더 예쁘고!”(동문 이충재 씨·54)

홈 쪽 관중석과 기자실에는 프로야구 구단 스카우트들과 미국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시선이 날카롭다. 김장백 한화 이글스 스카우트는 “게임마다 데이터를 모아 깊숙이 분석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폭설로 5회초 용마고 공격 1사 1루에서 경기가 중단됐다. 서스펜디드(일시 정지) 게임 선언. 용마고 응원석에서 열 명 남짓한 동문들이 한창 논의 중이다. “분위기 타는데 아까워서 우짜노.” “아아들 마, 우리가 돈 모아가 어디서 재아야지.”

“야구부 1년 예산 절반은 동문들이 댑니더. 매달 1만 원씩 후원하는 회원이 700명이라요. 상대가 작년 우승팀이라 걱정했는데 우리 아덜이 잘 하네요. 경남이 야구 인프라가 억수로 취약합니더. 지난해에는 선수 부족으로 해체위기도 겪었고요. 동문들 똘똘 뭉치게 하는 건 교기(校技)가 최고지예.”(조병진 씨·용마고 CMS 간사·49)

경기가 끝난 뒤 주 출입구 앞에는 동문들이 도열해 있다. 어느 경기나 비슷한 풍경이다. 이들은 문을 나서는 모교 후배들의 등을 두드리며 “수고했다” “잘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선수들은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모자를 벗고 꾸벅 인사를 하곤 한다.


○ 야구의 맛

 

16일 인천고 대 군산상고. 3회말 군산상고 공격. 1회에 군산상고는 이미 3점을 냈다. 3루 쪽 인천고 응원단석에서 한 아주머니가 일어서서 외쳤다. “경찬(문경찬·인천고 투수·3학년)아 잘했어! 하나만 잡자.”

인천고 동문들은 이날 인천에서 대형버스 2대를 빌려 상경했다. “요새 인고(인천고) 전력이 약해서 동문들이 별로 없네요. 인고가 잘 올라가면 이 운동장 꽉 찰 텐데….”(82회 졸업생 박광덕 씨·46)


단체관람 초등교 선수
“기본기 탄탄” 관전평

‘경기장 출근’ 실버 관중
대형 선수감 꼼꼼 메모


인천고 응원가가 구석구석에서 들려왔다. “1번 타자 안타 치고 2번 타자 번트 대고 세 번째 타자 히트 치면 네 번째 홈런일세. 고교야구 말하자면 인천고, 사윗감을 고르자면 인고동문일세∼.”

78회 졸업생 이기영 씨(50)는 경기 전날 3만3000원짜리 확성기를 샀다. “직원들이 ‘사장놈’ 어디 갔나 하겠네. 흐흐, 이름이 기사에 나면 야구장 온 거 들통 날 텐데. 난 인고 경기만 좋아해요. 인고니까 보러 오지. 근데 사실 아마추어 야구가 재밌어. 5점쯤 차이 나도 분위기 잘 타면 금세 뒤집거든.” 83회 졸업생 박태석 씨(45)가 거들었다. “애들이라서 분위기에 많이 흔들려요. ‘멘털 게임’이라는 게 고교야구에서 잘 드러나지.”

“범∼! 침착하게!” 쩌렁쩌렁한 목소리. 내야수 범성빈 선수(2학년)의 어머니 정미선 씨(46)였다. 아버지는 묵묵히 그라운드만 바라본다. “우리 아들은 제 목소리 안 들린다는데 그래도 늘 응원해요. 첫 출전이라 큰 기대는 안 하지만 ‘야구의 맛’을 조금이라도 알았으면 좋겠어요. 진로요? 어느 대학에서든 불러주면 다행이죠.(웃음)”

한 중년 동문이 정 씨에게 “아들, 우황청심환 하나 먹여야겠구만. (긴장해서) 얼었네”라고 말을 건넸다. 그는 “약의 힘을 빌리면 안 되죠. 스스로 이겨내야지. 이제 몸이 슬슬 풀리는 것 같은데요?”라고 답했다.

“야구부원 어느 누구도 평생 야구를 하면서 살 수는 없겠죠…. 야구를 하면서 체력의 한계에 닿고 극복도 하고 열심히 노력하면서 하나씩 돌파해 나가는 그 맛만 알아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다른 어떤 일을 해도 ‘아, 야구 할 때 노력하니까 되더라’는 경험이 큰 도움을 줄 테니까요.”


○ “형, 졌지만 희망을 봤어”

부천 북초등학교 야구선수들이 반듯이 앉아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김인기 감독(58)은 팔짱을 낀 채 꼿꼿이 서 있었다.

“형님들 경기 보고 응원도 하라고 데리고 왔어요. 경찬이 성빈이(인천고 문경찬, 범성빈 선수)가 초등학교 때 야구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반에서 1등 하는 애들이었는데 야구 시키자고 하니 부모들이 고민하지 않았겠어요? 내가 인생의 길을 완전히 바꿔 놓은 셈인데 책임감을 느끼죠. 아이들이 타석에 나오면 보람도 있고 덜컥 긴장도 되고 그렇습니다, 허허.”

김 감독은 “고교야구는 덜 여물었지만 ‘파이팅’이 있다”고 했다. “초등, 중학교 때 닦은 기량의 결실을 고교야구에서 펼치죠. 야구선수에게 중요한 시기입니다. 잘되느냐, 야구 인생이 끝나느냐 하는 순간이죠. 잘하는 선수인데도 큰 대회에서 긴장하거나 위축돼서 제 기량을 못 보여줄 때가 가장 안타깝습니다.”

꼬마들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다가왔다. “저도 말하면 신문에 나와요?” 김효성 선수(6학년)는 “프로야구에 비해 선수 나이도 어리고 실력도 달리지만 학교 선배들이 있고 기본기가 탄탄해서 재밌다”면서 웃었다. 최원탁 선수(4학년)는 “공 스피드가 빠르고 타격이 좋다”고 평가했다. 권준모 선수(6학년)는 메이저리그 간판 유격수가 꿈이란다. 찬 바람에 콧물을 쫄쫄 흘리면서도 “야구가 너무 재밌다”고 입을 모았다.

이날 인천고는 군산상고에 3 대 7로 졌다. 한 인천고 동문이 힘줘 말했다. “형, 오늘 우리가 졌지만 윤대경(투수)이라는 애를 발견한 게 우리 희망이야, 그치? 헛걸음 한 게 아니야.”


○ 야구는 취향

 

19일 강원 원주고 대 서울 장충고. 평일 낮 경기인데 장충고 덕아웃 쪽 관중석에 여고생 4명이 앉아 있었다. 장충고 투수 최우석 선수(2학년)의 동갑내기 ‘싸이 친구’라고 했다. 김성연 양은 “세계청소년 야구대회를 보다가 고교야구에 재미를 느꼈다”고 말했다. 중년의 동문들이 응원전을 펼치자 여고생들은 “아이, (목소리가) 걸쭉해” 하면서 까르르 웃었다.

해가 잘 드는 관중석에는 일군의 ‘실버 관객’들이 자리를 잡았다. 권병서 씨(82·서울 마포구 상암동)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영수증을 꺼냈다. 뒷면에 ‘상원고 투수 조무근, 타자 조원태, 박지규’라고 적어놓았다. 앞으로 대형 선수로 자랄 재목이라고 했다.

“프로야구는 너무 시끄러워. 밤에 하는 경기가 많고. 노인네들이 괜히 갔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째. 오전에 목동야구장 와서 1500원짜리 라면 하나 사먹고 애들 열심히 달리는 거 구경하다 가면 참 좋아.”(정현열 씨·81·서울 금천구 시흥동) 이틀 뒤 그를 야구장에서 또 만났다.


남친 위해 출동 여고생
“열심히 해 프로갔으면”

국내외 스카우트들
눈 번뜩이며 경기분석

원주고-장충고 경기 뒤에 이어진 서울 중앙고-휘문고 경기. 새로운 여고생 2명이 나타났다. 휘문고 선수의 ‘여친’이라고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기 보러 왔어요. 저도 이제 입시 준비해야 하니까요. 야구 하니까 자주 못 만나서 짜증나요. 남친은 프로 가고 싶다고 하는데, 뭐, 잘 모르겠어요. 각자 열심히 해야죠.”

21일 천안 북일고 대 대전고. 북일고 덕아웃 위쪽 관중석 맨 앞줄. 20대 여성 5명이 나란히 앉아 카메라 셔터를 쉴 새 없이 눌러댔다. 홍모 씨(23)는 “다듬어지지 않은 느낌, 분출하는 가능성이 멋지다”고 했다. 대전에서 왔다는 그에게 왜 북일고를 응원하는지 묻자 “내 취향”이라고 짧게 답했다.

회사원 이가연(21), 오효진(23), 김진선(22), 도현경 씨(20)는 프로야구 두산 베어스 팬으로 처음 인연을 맺었다. 얘기를 주고받다 보니 모두들 고교야구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고교야구 관람단’을 결성했다고 한다. 오 씨는 덕수고의 경기 스타일을 좋아한다. 짜임새 있는 운영, 우물쭈물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투수 김진영 선수(3학년)도 ‘찍어뒀다.’ 18일 덕수고-울산공고 경기에서 덕수고 사진만 1500장을 찍었다. 사진은 일부 블로그에 올리고 나머지는 소장용으로 보관한다. 김 씨가 고교야구를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프로에선 볼 수 없는 실수와 프로를 뛰어넘는 플레이를 모두 만날 수 있는 곳.”

이번 대회 결승은 29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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