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대통령실에서는 침묵 속에도 온갖 썰이 넘쳐납니다. 동아일보 대통령실팀 기자들이 함께 쓰는 디지털 전용 콘텐츠 [용썰]은 대통령실을 오가는 말의 팩트를 찾아 반 발짝 더 내디뎌 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2일 경기 평택시 소재 해군 제2함대사령부에서 거행된 제9회 서해수호의날 기념식을 마친 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의대 증원 규모가 대학별로 확정됨으로써 의료개혁을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이 만들어졌다. 의대 증원은 의료개혁의 출발점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2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에 이같이 못을 박았습니다. 공교롭게도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은 “의제를 제한하지 않고 건설적인 대화를 해서 좋은 결론을 내야 한다”며 유연한 입장을 시사했습니다. 실제 한 위원장은 대통령실에 의정 대화에 의대 정원 증원을 조정하는 문제도 열어둬야 한다는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에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문제를 놓고 대통령실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2000명 증원을 유지하는 ‘원칙론’과 여당 주장을 수용하고 의료계와의 대화를 위한 ‘유연론’을 놓고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위원장은 물론 수도권에 출마하는 후보들을 중심으로 2000명 증원 재조정 목소리가 분출되면서 윤 대통령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실은 여전히 의대 정원 증원 및 의료개혁에 대한 명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당 내에서는 눈앞으로 다가온 4·10 총선과 국민의 피로감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윤 대통령이 한 위원장의 요청을 수용할지, 특유의 뚝심으로 밀어붙일지 갈림길에 선 것으로 보입니다. ‘윤-한 갈등’의 또 다른 뇌관이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지만, 총선이 불과 10여 일 남은 만큼 직접적인 충돌은 피하는 분위기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2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제23차 비상경제민생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2000명 증원 변함없다”는 대통령실, 총선 앞두고 속내 복잡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27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의료계의 의대 증원 규모 축소 요구와 관련해 “지난 20일 2025학년도 의대 정원 대학별 배정은 완료가 됐다”며 “전제 조건 없이 다시 한번 대화에 나서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밝혔습니다. 의정 갈등의 핵심 쟁점인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조정 가능성을 일축한 것입니다.
대통령실은 이미 대학별 배분까지 마친 만큼 돌이키긴 어렵다는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입시와도 연계된 문제로 재조정을 할 경우 또 다른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00명 증원에 대한 윤 대통령의 의지는 강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윤 대통령은 의대 정원 증원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던 지난달 초부터 줄곧 대통령실 참모들에게 강경한 입장을 주문한 바 있습니다. 한 여권 관계자는 “대통령실 고위 참모들이 의대 정원 증원과 관련한 메시지 수위나 속도 조절을 얘기했다가 윤 대통령에게 혼이 난 적도 있다”고 전했습니다. 그만큼 의대 정원 증원 문제에 대한 윤 대통령의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의대 정원 확대 문제가 탄력을 받을 때 여권에서는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이 윤 대통령의 최대 업적이 될 수 있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2006년 이후 19년째 3058명으로 동결된 의대 정원을 대폭 확대하는 것 자체가 과거 정부들이 실패한 일을 해냈다는 타이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동훈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이 27일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윤-한 갈등’은 피하는 분위기 그러나 의대 정원 증원 문제를 둘러싸고 의정 갈등이 장기화하면서 ‘원칙론’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실의 속내는 복잡한 상황입니다. 4·10 총선을 눈앞에 둔 만큼 대통령실의 유연한 정무적 판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총선 앞 정권 심판론이 거세지면서 수도권 지역 후보들을 중심으로 증원 규모 재조정 주장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한 여권 관계자는 “2000명을 고집하면 안 된다는 우려가 대통령실로 전달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이에 따라 윤 대통령이 정무적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옵니다. 여권 관계자는 “대통령이 의료계와 대화와 소통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이 문제 해법을 고심하고 있다는 방증”이라며 “정원 문제를 대화 테이블에 올리는 것 자체는 여권의 ‘악재’도 ‘정책후퇴’도 아니라는 판단이 설 수도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난 24일 한 위원장이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를 만난 뒤 내놓은 “의료 현장을 이탈한 전공의들에 대한 면허정지 행정처분을 유연하게 처리해 달라”는 요청을 윤 대통령이 수용했던 것과 같은 모양새를 갖출 수 있다는 전망도 조심스럽게 있습니다.
의료계의 목소리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는 기류도 있습니다. 한 고위 관계자는 “의료계가 증원 규모에 대해 입장을 달라고 해도 한 번도 준 적이 없다”며 “대화를 통해 의료계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들어본다는 점에서는 우리도 입장이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 관계자는 의료계가 제시한 증원 규모가 타당성이 있을 경우 정원 조정이 가능하느냐는 물음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볼 일”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대통령실의 속내가 복잡하지만 분명한 건 있습니다. 의대 정원 확대 문제를 두고서는 ‘윤-한 갈등’은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은 이종섭 주호주 대사 조기 귀국 문제와 황상무 전 대통령시민사회수석의 사퇴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었습니다. 국민의미래 비례대표 명단을 두고도 여진이 이어졌지만 결국 봉합 수순을 밟았습니다.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은 지난 22일에는 ‘서해수호의 날’ 행사에 참석하고, 폭침됐던 천안함 선체를 함께 둘러보기도 했습니다. 행사를 마친 후 윤 대통령은 차에 탑승하기 전 한 위원장과 악수하며 어깨를 두드려 주기도 했습니다. 당시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당정 간 갈등이 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28일부터 4·10 총선 공식 선거운동기간이 시작되는 상황에서 의대 정원 증원 문제로 또다시 갈등을 빚는다면 총선 구도 자체가 어그러져 두 사람 모두에게 치명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양측 모두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상헌 기자 dapap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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